정신분석학을 이해하는 최상의 방법은 여전히 그 기원과 발전을 추적하는 것이다. 1880년과1881년에 저명한 의사이자 실험생리학자인 빈의 요제프 브로이어 박사는 자기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심각한 히스테리 질환에 걸린 한 소녀를 치료하는데 몰두 하고 있었다. 임상적인 상태는 운동 신경 마비,억압,의식 장애가 결합되어 있었다. 매우 총명한 사람이었던 환자 자신이 그에게 암시한 바를 좇아 그는 그녀를 최면 상태에 빠지게 했고,그녀의 마음속에 맨 먼저 떠오르는 기분과 생각을 묘사하게 함으로써 그녀가 각각의 특수한 경우에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동일한 실험적인 과정을 철저히 반복하여 그녀를 억압과 마비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성공을 거두어서, 마침내 수수께끼 같은 신경증의 본성에 대한 예기치 않은 통찰과 치료 면에서의 커다란 성공으로 자신의 수고를 보상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이어는 그의 발견을 더 철저히 하지 않았고,프로이트가 개인적인 영향력으로 그를 설득해 그 주제를 새롭게 수용하여 그것에 관한 공동 연구에 착수하기까지,약 10년 동안 그 사례에 관해 어떤 것도 발표하지 않았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 이 두사람은 1893년에 히스테리 현상의 심리적 기제에 관하여 라는 예비적인 논문을 발표하였고,1895년에는 히스테리 연구를 출판했는데 이 책에서 그들은 그 치료 방법을 카타르시스라고 이름붙였다.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연구에 놓여 있는 탐구는 두가지 주요한 결과로 인도했고, 이 결과들은 후속하는 경험에 의해 흔들리지 않았다. 첫째로 히스테리적인 증후는 정상적인 정신 활동을 대체함으로써 의미를 가지며,둘째로 알려지지 앟은 이러한 의미를 드러내는 일은 그 증후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사례에서 과학적 연구와 치료적 노력은 일치한다.. 브로이어이 첫번째 환자와 동일한 방식으로 치료받았던, 깊은 최면 상태에 빠졌던 환자들에 관해 관찰이 수행되었다. 그 당시에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에 의해 제기된 이론적인 표상들은 외상적 히스테리에 관한 샤르코의 이론에서 양향을 받았고, 그의 제자인 피에르 자네의 발견에서 지지르 구할 수 있었다.
그 발견은 비록 히스테리 연구 보다 일찍 출판되었지만,실제로는 브로이어의 첫번째 사례보다 나중의 것이었다. 처음부터 감정의 요소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히스테리적 증후는 감정의 무거운 짐을 진 정신적인 과정이 어떤 식으로든 의식과 운동으로 이끄는 정상적인 통로를 따라서 안정적인 상태가 되지 못할 때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어떤 의미에서는 괄약된 감정이 잘못된 통로를 따라서 딴 곳으로 돌려지고 신체의 신경자극 전달 속으로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발병시키는 표상들이 나타나는 경우는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에 의해 정신적 외상이라고 시술되었고, 이러한 것들은 매우 멀리 떨어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그 저자들이 히스테리 환자들은 주로 회상으로 인해 고통받는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치료받는 중에 의식으로의 통로가 열리고 정상적으로 감정이 해방될 때 카타르시스가 일어났다. 이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은 무의식적인 정신 과정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자네 역시 정신생활에서의 무의식적인 행위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가 정신분석학에 대한 나중의 논쟁에서 강조했듯이,그에게 이것은 임시방편의 표현에 불과 했고, 그는 그것에 의해 어떤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았다.히스테리 연구의 이론적인 장에서 브로이어는 정신에서의 흥분 과정에 관한 약간의 사변적인 사상을 제시했다. 이 사상들은 사고의 미래 노선을 결정했지만,오늘날까지도 제대로 된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과학 분야에 대한 그의 공헌을 종결지었고 그 후 곧 그는 공동작업에서 물러났다.
브로이어는 병원적인 표상들은 정신적인 기능이 특수한 제한 아래 놓여 있는 최면 상태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외상적인 결과를 산출한다고 가정했다. 자네는 히스테리 환자가 자신들의 정신 내용을 결합시킬 수 없는 구성적인 무능력 상태를 병원으로 보았고, 바로 이 점에서 그가 브로이어와 프로이트의 행로에서 갈라졌던 것이다.카타르시스 요법을 포기하게 된 두개의 혁신은 이미 히스테리 연구에서 언급되었다. 브로이어가 물러난 후에 그것들은 새로운 발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신분석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유일한 대표자였던 프로이트의 작업에 의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 1906년에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블로일러와 융은 분석학에서 활발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908년에 정신분석학 지지자들의 첫번째 회의가 잘츠브르크에서 열렸고 그 젊은 과학은 곧 정신과 의사들과 문외한들 사이에서 관심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권위에 대한 병적인 갈망을 가진 독일에서 정신분석학 수용은 독일 과학의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고,블로일러와 같이 냉정하고 당파적인 사람조차 정력적인 항의를 할 정도로 움직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회의에서의 어떤 비밥이나 퇴장도 정신분석학의 내적인 성장이나 외적인 확장을 방해할 수 없었다.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부다페스트의 안톤 폰 프로인트 박사는 국제 정신분석 출판사를 설립했는데, 그 출판사는 정신분석학과 관련된 잡지와 책을 출판한다. 그리고 1920년에 아이팅곤 박사는 베를린에서 빈궁한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최초로 정신분석 병원을 열었다. 1911년과 1913년 사이에 정신분석학에서 분열된 두개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그 운동들은 명백히 정신분석학의 내용 중에서 혐오감을 주는 특징들을 완화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이들중 하나 융에 의해 지원받는 윤리적 기준에 순응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단지 상징적 가치만을 부여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참된 의미를 제거해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망각된 것과,우리가 그렇게 부르듯이 전사적 유아기를 드러내는 일을 게을리했다. 다른하나는 빈의 알프레트 아들러에 의해 출발한 정신분석학으로부터 많은 요소를 다른 이름으로 재생산했다.
그러나 다른면에서 이운동은 무의식적인 것과 성적인 본능으로부터 관심을 돌렸으며 성격발달과 신경증의 발달을 힘에의지로 소급시켰는데 이는 과도한 보상에 의해 기관 열등성으로부터 나타나는 위험을 점검하려고 노력한다 체계적인 구조를 갖추고 이 두개의 운동은 정신분석학에 아무런 영속적인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아들러 이론의 경우, 그 이론이 정신분석학과 별로 공통점이 없으며 정신분석학을 대체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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